본문 바로가기
관심분야/역사

외부의 침입보다 무서운 분열: 펠로폰네소스 전쟁

by Ignition-Inform 2022. 5. 6.
반응형

외부의 침입보다 무서운 내부 분열: 펠로폰네소스 전쟁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내전으로 표현할지 국가 간의 전쟁으로 표현할지에 대한 것에 고민이 있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폴리스를 각각의 다른 나라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각각의 폴리스를 하나의 그리스로 인식하고 펠레폰네소스 전쟁을 바라보고자 한다. 지금부터 펠레폰네소스 전쟁에 대해 알아보자.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기원전 431 ~ 404년까지 고대 그리스에서 일어난 전쟁이다. 아테네 주도의 델로스 동맹과 스파르타 주도의 펠로폰네소스 동맹 사이에서 벌어진 전쟁으로 해당 전쟁은 역사가들에 의해 세 단계로 구분된다.

첫 번째 단계는 아르키다모스 전쟁이다. 스파르타는 아티케로의 침략으로, 아테네는 내부적인 불안을 억누르기 위해 자국의 해군력을 이용하여 펠레폰네소스 반도 습격을 시작으로 기원전 421년 니키아스 평화조약이 체결되면서 막을 내렸다.

수많은 역사 속에서 평화조약은 단순한 종잇조각에 불과하다는 것을 2500년 전에도 증명하는 듯하다. 니키아스 평화조약 이후 펠로폰네소스에서 다시 교전이 일어나 기원전 415년 아테네는 시칠리아의 시라쿠사를 공격하기 위해 원정대를 파견하였다. 하지만 기원전 413년 원정대가 대패하며 두 번째 단계는 막을 내리게 된다.

세 번째 단계로데켈레이아 전쟁혹은이오니아 전쟁이다. 아이고스포타모이 해전에서 아테네 함대가 전멸하면서 제해권을 확보하였다. 또한 페르시아의 도움을 받아 아테네의 영향력에 있는 에게해와 이오니아의 나라에서 일어난 반란을 지원하여 내부를 흔들었다. 이후 아테네는 항복하며 펠레폰네소스 전쟁은 끝을 맺게 된다.

역사가 투키디데스는 전쟁의 시작을 스파르타와 아테네가 에피담노스에서 벌어진 분쟁에서 시작되었다고 기록했다. 에피담노스는 이오니오스 만 서북쪽에 위치한 식민지로 케르퀴라의 식민지였지만 건설자는 코린트인 팔리오스였다. 팔리오스를 포함한 코린트인들은 에피담노스를 자신들의 식민지로 생각하고 있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직전 에피담노스에서는 민중파와 귀족 사이의 분쟁이 벌어진다.

민중파는 케르퀴라에 지원을 요청하지만 거절당하게 된다. 그로 인해 민중파는 델포이 신탁을 명분으로 코린트인에게 도시를 맡아 달라고 요청했다. 코린트인들은 케르퀴라와의 갈등으로 이를 수용하며 육로를 이용해 아폴로니아로 파병한다. 이에 케르퀴라는 25척의 함선을 파병한다.

스파르타와 아테네는 에피담노스를 두고 협상을 시도하지만 실패하고 전쟁은 발발하게 된다.  코린트는 75척의 함선에 2000여명의 중무장 보병을 에피담노스로 보냈다. 케르퀴라는 80척의 함선으로 악티움 만에서 싸우게 된다. 악티움만 해전으로 케르퀴라는 승리하며 15척의 코린트 선박을 파괴했다. 이후 케르퀴라는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하여 코린트의 식민지 레우카스와 동맹국인 엘리스의 퀼레네 항구를 공격한다. 그렇게 1년간 대치하던 중 코린트가 대대적으로 전쟁 준비를 시작했다. 전에 승리하기는 했지만 동맹국이 없던 케르퀴라는 아테네에 동맹을 요청하고 이에 코린트도 아테네에 도움을 요청한다.

아테네는 2번의 민회 끝에 케르퀴라가 직접 침공당할 경우에만 파병한다는 조건부 동맹을 맺고 10척의 함대를 파견한다. 이후 코린트와 동맹국은 150척의 대규모 함대를 케르퀴라 앞바다에 파견했고 이에 케르퀴라도 140척의 함대로 대응해서 대규모 해전이 벌어진다. 코린트가 70척의 함대를 파괴해서 우위에 있었지만 상황을 지켜보던 아테네의 20척의 함대가 추가로 투입된다. 아테네의 개입에 코린트는 후퇴하게 된다. 이후 코린트가 아테네 함대에 사절을 보내 개입한 이유를 물었고 민회에서 결정된 동맹이라 설명했다. 코린트도 아테네와 전쟁을 벌이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하여 퇴각하게 되면서 악티움 해전은 막을 내리게 된다.

개전초기, 스파르타는 해군보다 육군이 강력했고 아테네는 해군에 대한 경험이 많았기 때문에 아테네가 승리할 확률이 높았다. 아테네군의 펠레폰네소스 반도 해안 습격을 시작으로 전쟁은 시작되었다. 그러나 뜻밖의 태풍, 해일 등의 자연재해를 만나 개전 전에 큰 피해를 보게 된다.

이에 비슷해진 해군력으로 스파르타와 아테네는 10년간 전쟁을 지속하다가 기원전 421년 니키아스 평화조약이 맺어져 양측은 휴전 조치를 내렸고 한동안의 평화가 계속된다.

계속된 전쟁으로 델로스 동맹국 간의 분열이 일어나 평화는 지속되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아테네는 스파르타에 휴전을 먼저 제안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동맹국들이 델로스 동맹 탈퇴와 펠로폰네소스 동맹에 가담할 우려가 있었고 그러한 상황이 발생할 경우 아테네로써는 군사적으로 약해질 뿐만 아니라 여차하면 스파르타와 펠로폰네소스 동맹이 공격해 들어오면 제국의 영원한 멸망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스파르타에 휴전협정을 먼저 요청하였다.

하지만 펠로폰네소스에서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충돌이 일어나면서 니키아스 평화조약은 파기되었다. 기원전 415년 아테네는 시칠리아의 시라쿠사를 공격하기 위해 대규모 시칠리아 원정대를 파견하였다.

아테네는 스파르타를 막기 위해 알키비아데스로 새로운 아테네군 책임자로 임명하였다. 그는 스파르타의 군사정보를 파악하는 한편 군사 배치 등을 계획 중이었으나 전쟁 개시 전에 내분이 먼저 발생한다. 자신의 정적들의 사소한 고발과 모함으로 자신이 죽을 위기에 처한 것이다. 알키비아데스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스파르타로 망명하여 아테네의 군사 상황을 모두 넘겨버린다. 이 사건이 아테네 패배의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 결국, 기원전 413년 아테네군은 대패하였다.

스파르타는 이와 동시에 페르시아와 군사협정 체결을 하고 페르시아의 지원을 받아 아테네의 영향력에 있는 에게해와 이오니아의 나라에서 일어난 반란을 지원하여 아테네의 패권과 군사력을 약화했다. 기원전 404년에 일어난 아이고스포타모이 해전에서 아테네 함대를 궤멸시켜 해상권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이 해전을 끝으로 아테네는 사실상 항복하게 된다. 스파르타는 아테네의 도시 성벽을 모두 허물도록 했으며 아테네는 전쟁 전의 영광을 찾을 수 없게 된다.

펠레폰네소스 전쟁은 많은 것을 느껴주게 한다. 영화 300으로도 유명한 그리스 & 페르시아 전쟁에서는 스파르타와 아테네가 힘을 합쳐 페르시아를 막아내며 그리스는 번영을 누리게 된다. 하지만 분열된 그리스에서는 스파르타라는 승자는 세계의 중심에서 멀어지며 로마의 속국으로 전락하게 된다. 단 한 번의 분열로 역사의 주연에서 조연으로 추락하는 모습을 보며 많은 것을 느끼게 하는 사건이라 할 수 있겠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