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관심분야/역사

카르타고의 멸망: 제3차 포에니 전쟁

by Ignition-Inform 2022. 5. 27.
반응형

이전 내용이 궁금하다면 제2차 포에니 전쟁에 대한 글을 참고하도록 하자.

 

2022.05.11 - [관심분야/역사] - 알프스를 넘어간 한니발: 2차 포에니 전쟁

 

알프스를 넘어간 한니발: 2차 포에니 전쟁

1차 포에니 전쟁에 이어서 제2차 포에니 전쟁에 대해 알아보자. 2차 전쟁에서는 나폴레옹 이전 알프스산맥을 최초로 넘은 지휘관 한니발이 주연이다. 1차 포에니 전쟁이 끝난 뒤 정치적 영향력을

ignition-inform.tistory.com

 

기원전 149 ~ 146년에 걸쳐 일어난 제3차 포에니 전쟁은 로마와 카르타고의 최후의 전쟁으로 이 전쟁의 결과 카르타고는 완전히 멸망하였다. 이는 단순히 한 나라의 종말이 아니라 페니키아 문명의 종말이었다. 본토 페니키아가 이미 멸망한 상태에서 페니키아의 유력한 후계 도시이던 카르타고마저 멸망하면서 페니키아 문명이 완전히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후 로마는 패망한 카르타고의 영토를 식민지로 접수하면서 지중해의 절대 강국이 되었고 카르타고는 이전의 포에니 전쟁에서 연패하면서 서부 지중해 패권을 완전히 상실하였다.

 

패배한 카르타고는 로마와 강화를 맺으면서 해군을 해체하고, 이미 점령당했지만 모든 해외 영토의 소유권을 로마에 완전히 넘겼다. 그리고 로마의 허락 없이는 전쟁할 수 없게 되었다. 사실상 카르타고는 로마의 속국으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게다가 로마에 엄청난 공포를 안겨주었다 보니 로마인들에게 미운털이 단단히 박혀 있었다. 그나마 스키피오 나시카 등의 온건파는 카르타고의 존속을 주장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여전히 카르타고는 풍부한 농업 생산력과 뛰어난 상업력 때문에 경제적으로 풍요로웠으나 군사적으로는 완전히 몰락한 상태였다. 1, 2차 전쟁 때와는 달리 이 시점의 카르타고는 이탈리아를 넘어 1차와 2차 동안에 이베리아반도는 물론, 그리스를 사실상 손아귀에 넣고 중동의 헬레니즘 왕조들까지 정복하며 군사력을 전 지중해에 과시하고 있던 로마에 대항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졌다. 카르타고의 멸망을 불러온 결정적인 문제는 카르타고가 여전히 부유했다는 점이었다. 카르타고가 차라리 빈곤하고 가난한 나라가 돼서 정말로 로마의 자비에 구걸하는 신세가 되었다면 그나마 목숨은 부지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페니키아인들이 공들여 개척한 농업 생산력과 뛰어난 해상 무역 덕분에 카르타고는 패배 후 무장을 해제당했음에도 여전히 부유하고 잘 사는 나라였다. 그러나 문제는 카르타고인들이 이제 자신들의 ''를 스스로 지킬 수 있는 ''을 잃어버렸다는 것이었다. 그 때문에 이러한 카르타고의 부를 탐냈던 것이 전쟁의 원인이었다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카르타고가 그 부를 통해 다시 카르타고가 다시 강성해지는 것이 두려웠다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그렇게 보아야 하는 이유는 카르타고 점령 후의 로마가 카르타고를 철저하게 파괴했기 때문이다. 카르타고는 기원전 150년에 인구 25만의 엄청난 대도시였으며 웅장한 건물도 많이 있었다. 기계도 없이 손으로 건물을 지어야 하는 시절에 25만의 인구를 수용할 수 있는 대도시가 얼마나 큰 가치가 있을지는 말할 필요도 없다. 게다가 사막화가 진행되어 척박한 땅인 지금과는 달리 당시의 카르타고는 풍요로운 곡창지대를 갖고 있었으며 지중해의 한 가운데라 교역에 유리한 거점이기도 했다. 제정 로마 시절의 카르타고가 재건된 도시임에도 인구가 50만까지 늘어나 아프리카 속주의 주도가 되었다는 것만 봐도 고대 지중해 세계에서 카르타고의 입지 조건이 얼마나 좋았는지 알 수 있다. 상식적으로 이런 도시를 점령했으면 거주민은 노예로 팔아버리거나 죽이더라도, 도시 자체는 이주민을 보내는 것이 유리하다. 이런 도시를 로마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17일 동안 철저히 태우고 뭉개버렸다. 어찌나 철저히 때려 부쉈던지 오늘날 제정 로마 시절의 유적은 곧잘 발굴돼도 도시국가 카르타고의 유적은 잘 안 나올 정도. 로마가 점령한 도시는 숱하게 많지만 이런 운명을 맞은 도시는 카르타고 외에는 거의 없다. 로마가 단지 카르타고의 부를 탐냈다면 이렇게까지 철저하게 도시를 부숴버릴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한마디로 로마인들에게 카르타고는 저주스러운 이름이었고, 2의 한니발이 나올까 봐 두려웠다. 카르타고가 재건되는 건 로마인이 카르타고에 대한 강박관념을 완전히 떨쳐낸 건 100년 뒤인 카이사르 시절이었다. 불과 50년밖에 지나지 않은 아우구스투스 시절에는 이미 인구 50만을 찍을 정도로 발전했다.

 

한동안 카르타고와 로마 사이에는 평화가 지속되었다. 카르타고를 굴복시킨 로마는 다음 목표로 풍요로운 동방에 위치한 헬레니즘 국가들을 노리고 그리스인들의 분쟁에 개입하여 그리스에서 전쟁을 시작하게 된다.

기원전 188년 로마는 안티오코스 3세의 치세 하에서 전성기를 누리던 셀레우코스 제국을 격파하면서 그리스와 아나톨리아에서 패권을 확립하였고, 패권 하에 들어온 그리스와 아나톨리아 일대의 군소국가들을 상대로 온건주의 외교를 추진하게 된다. 당시 로마 원로원 내에는 스키피오 가문을 위시한 온건파가 많았고 또한 온건주의 외교는 이탈리아 내의 동맹 도시들을 다루는 전통적인 방식이었다. 온건주의 외교 노선은 로마 문화의 전통인 파트로누스, 클리엔테스 관계를 국가 간에 적용한 것으로 로마가 파트로누스 역할을 하고 동맹 도시들이 클리엔테스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이 관계에서 로마는 동맹도시들에게 보호를 제공하고 동맹 도시들은 로마에 지원을 해주어야 하는 책임이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관계에서 전제되는 것은 동맹 도시들이 로마의 패권을 자발적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관계는 상당히 느슨했는데 이탈리아 내의 도시국가들은 로마와 수백 년간 전쟁을 했으므로 로마의 군사적 강력함을 알고 있었고 또한 지리적으로 가까웠으므로 이 관계를 훌륭하게 유지해왔다.

 

그 때문에 로마는 그들의 온건한 외교 노선을 신뢰하고 있었고 따라서 동방의 새로이 패권하에 들어온 그리스 국가들에도 같은 노선을 적용했다. 하지만 그리스는 이탈리아 도시들과는 달랐다. 이들은 로마와 전쟁을 해본 경험도 별로 없는 데다 지리적으로도 이탈리아 도시들에 비해 멀리 떨어져 있었으므로 로마를 그다지 위협적으로 여기지 않았다. 또한 파트로누스 클리엔테스 관계라는 것은 그리스인들에게는 생소한 개념이었다. 그리스인들은 개인주의적 사상이 매우 강했고 이것은 그리스 철학의 발달 등으로 표현되었다. 또한 많은 도시에서 귀족은 몰락했고 완전 민주주의를 하고 있었다. 강력한 가문이 뒤를 봐주고 그의 서포트가 된다는 식의 로마식 전통을 이해할 리 없었다. 그 때문에 그리스의 도시들은 자발적으로 로마의 패권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고 또한 로마의 온건한 외교를 로마인들이 그리스인들의 우수한 문화에 열등의식을 느껴 비굴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하였다.

 

그 결과 그리스인들은 로마인들에 대해 상당히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은 물론 사사건건 군사적으로 반발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태도는 새로 손에 넣은 도시들이 당연히 클리엔테스의 책임을 다할 줄 알았던 로마엔 뜻밖이었고, 당혹스러운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 지친 로마인들은 온건주의 외교 노선에 대해 의심을 하기 시작하였고 이에 대해 비판적인 여론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특히 로마 시민들은 이렇게 반발할 때마다 전쟁터에 끌려가야 했기 때문에 그리스의 잦은 반발에 대해 꽤 분개하고 있었다.

발레리아누스 가문은 명 웅변가 카토를 내세워 이러한 여론에 편승하여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려고 하였다. 발레리아누스 가문이 영향력을 확대하자 온건주의 노선이었던 스키피오 일족이 속한 코르넬리우스 가문의 정치적 영향력은 점차 약화하였고 이러는 과정에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탄핵당해 실각하기도 하였다. 시간이 갈수록 원로원 내의 카토의 영향력은 확대되었고 이것이 시민들의 호응을 얻자 로마는 점점 강경노선 외교로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새롭게 정계의 중심인물로 부상한 카토는 두 가지로 유명하였는데, 첫째로 그리스 문화를 매우 혐오하는 태도를 보였고, 둘째로 카르타고를 반드시 멸망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카르타고와 별 관련 없는 연설에서도 연설 말미를 장식한 "Carthago delenda est"(카르타고는 멸망해야 합니다)라는 명대사가 그의 주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

 

로마의 정세 변화를 지켜보던 누미디아의 왕 마시니사는 자신의 왕국을 넓히기 위해 바로 옆에 붙어있었던 카르타고를 침략하기 시작하였다. 카르타고는 누미디아의 침략과 약탈로 큰 피해를 보았는데 로마의 허락 없이 전쟁할 수 없었으므로 로마에 군사적 행동의 허가를 요청했으나 로마는 2차 포에니 전쟁의 동맹국이었던 누미디아에 우호적이었고 여전히 카르타고에 적대적이었다. 따라서 로마의 허락을 받을 수 없었다. 이에 따라 카르타고 내에서 반로마 감정이 강해지기 시작했다.

마침내 이것을 견디다 못한 카르타고는 로마와 맺은 조약을 무시하고 군사행동을 하기로 결정하고 대규모 용병을 모집해서 25,000의 병력으로 누미디아에 맞서 싸웠지만, 카르타고가 이미 예전의 카르타고가 아니었기 때문인지 오히려 이들은 누미디아 군에게 패배했다. 패배한 카르타고는 누미디아에 50년간 배상금을 주기로 하였고 누미디아 군은 본국으로 철수한다. 하지만 이 패배뿐만 아니라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 소식을 들은 로마 원로원은 즉시 무단으로 전쟁을 벌인 카르타고에 선전포고를 결의했다.

 

카르타고는 로마 원로원에 사절을 여러 차례 보내 사과하며 앞으로는 강화를 준수하겠다고 하였다. 그러자 로마는 카르타고 전체의 무기 몰수와 새로운 배상금 부과 등 다양한 압박을 가했고 카르타고는 로마가 내세우는 여러 가지 조건을 모두 받아들였다. 로마는 조건대로 카르타고가 모든 조건을 받아들여서 배상금과 무기들을 넘겨받자 더욱 중대한 조건을 내놓았는데, 선전포고의 철회 대가로 수도를 파괴하고 모든 주민을 해안에서 15km 밖으로 이주하도록 협박했다.

이 조건에 대해 카르타고 사절들은 카르타고를 죽이는 것이라고 항의했으나 로마 원로원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전쟁일 뿐이라며 이들을 돌려보냈다. 카르타고 사절의 절반 이상은 카르타고로 돌아가는 중에 다른 나라로 달아나버렸다. 이들은 카르타고 시민들이 이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며 따라서 분노한 시민들을 마주하기 전에 목숨을 구하고자 한 것이었다. 과연 카르타고 시민들은 이 조건을 듣자마자 분노하며 귀국한 사절들을 모두 처형해버렸다. 이것은 이 사절들이 카르타고 내에서 로마와 대화로 풀어야 한다고 끊임없이 주장한 뒤 시민들을 설득해 사절로 간 평화주의자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사절들을 다 처형한 뒤 카르타고인들은 로마와 전쟁을 결의하기로 결정한다. 이것이 3차 포에니 전쟁이었다.

그렇게 카르타고와 로마는 다시 전쟁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미 승패는 전쟁을 시작하기 전에 난 것이나 다름없었고, 카르타고인들은 그들의 손으로 자신들의 도시를 파괴해 굴욕감과 비참함을 맛보느니 끝까지 로마인들과 싸우다 죽는 것을 택한 것에 불과했다.

 

전쟁을 시작하자마자 로마군에 의해 카르타고 시가 완전히 포위되어 공방전이 되었다. 카르타고는 로마에 무기를 빼앗겨 무장 해제된 상태였지만, 도시 내에서 무기를 빠르게 생산하여 급히 재무장을 갖췄다.

카르타고의 힘줄을 끊어놓은 아프리카누스만큼은 아니더라도, 마지막 숨통을 끊는 것 역시 절대 작지 않은 명예가 될 것이었다. 2의 아프리카누스를 노린 로마의 집정관들이 맹공을 퍼부었지만, 카르타고인들은 아예 살아남으려는 생각을 하지 않고 처절하게 항전하며 3년이나 버텨냈다. 카르타고인들이 육상으로도, 해상으로도 완전히 고립된 도시에서 군대의 양과 질, 전략과 보급 등 어떤 면으로도 부족함이 없었던 로마군을 상대로 이만큼이나 버틴 것은 물론 대단했으나, 이것은 적을 물리치는 것이 아니라 그저 하루하루 파멸을 늦추는 것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로마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모든 면에서 압도적인 우세를 점하고 완전히 고립시킨 적을 3년씩이나 몰아붙였는데 아직도 함락시키지 못한 것은 전혀 즐거운 상황이 아니었다. 이렇게 장기전이 되면서 엄청난 시간과 인력, 물자가 소모되었고, 로마 시민들의 전쟁 피로도 역시 계속해서 심화하였다.

 

그 결과 전쟁에 넌더리가 나버린 로마 시민들은 전쟁을 그만두는 것이 아니라 집정관 자격 연령에 약간 미달했지만 카르타고 포위전의 첫 2년 동안 다른 지휘관들보다 확연히 나은 활약을 보여 준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를 집정관으로 선출하여 지휘를 맡겼다. 원칙을 어겨가며 뽑아준 만큼 반드시 끝장을 보라는 의사표시였다.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의 지휘로 로마군이 집요하게 공격하면서 결국 전쟁 3년 차에 성벽이 뚫렸다. 도시에 진입한 로마군은 저항하는 카르타고 시민들과 시가전을 벌였는데 이때 카르타고인들은 대부분 무장한 채 로마군에 맞서 싸웠고 이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이 학살당하고 희생하거나 자살하였다. 마지막 저항까지 끝장날 무렵에는 살아남은 카르타고인은 고작 5만 남짓에 지나지 않았고,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노예의 낙인이었다. 텅 빈 카르타고는 껍데기조차 깨끗이 태워졌고, 빈터에는 소금이 뿌려지며 완전한 불모지가 되어버렸다. 도시는 아우구스투스가 재건하기 전까지는 폐허 상태로 방치되었고 기원전 146년 카르타고는 멸망하고 만다.

 

전설에 따르면 스키피오는 멸망하는 카르타고를 보면서 트로이의 멸망을 예견하는 일리아스의 한 구절을 읊으면서, 언젠가는 로마 역시 카르타고처럼 멸망할 것이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예언은 서로마에는 로마 약탈, 동로마에는 제20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에서 보듯 비교적 유사하게 들어맞았다.

카르타고의 영토는 로마의 직할령에 편입되어 아프리카 속주로 재편되었다. 북아프리카의 풍요롭고 비옥한 농지는 라티푼디움으로 바뀌어 로마 귀족들에게 막대한 부를 안겨 주었다.

한때 수백 년간 지중해를 호령했던 해양 민족 카르타고의 본거지는 백 년이나 방치되어 있다가 율리우스 카이사르 때에 라티푼디움 위주로 비로소 재건을 시작했고, 아우구스투스가 재건을 마친 뒤에는 좋은 항구의 기능을 하기 시작했고 이슬람의 침공 이전까지 북아프리카의 주요 도시로서 기능하게 된다.

 

여담으로 1985 1월에는 이탈리아의 로마 시장 유고 베텔레와 튀니지의 튀니스(현재의 카르타고) 시장 체드리 쿠리빈이 만나 공식적으로 전쟁 종결에 서명하기도 했다. 이로써 공식적으로 보면 3차 포에니 전쟁은 2131년 만에 끝난 셈이다. 이렇듯 2천여 년이 지난 이후에 전쟁 종결에 서명하게 된 것은, 공식적인 종전 선언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만 고대에는 종전협정이 있어야 전쟁이 끝난다는 개념이 없었고, 더군다나 이 전쟁은 카르타고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마지막이라서, 종전협정 자체가 있을 수가 없다. 어차피 현대 이탈리아나 현대 튀니지가 역사적으로 봤을 때는 포에니 전쟁의 당사자도 아니다. 이건 그냥 이탈리아와 튀니지의 관계 개선을 위한 퍼포먼스이자 상징적인 협정이다.

 

강력한 힘이 없으면 나라가 망한다는 것을 절실히 보여주는 전쟁이었다. 당시 카르타고의 국력이 약했던 것은 아니다. 위에 서술되어 있듯 상업이 발달한 도시국가였기에 수준 높은 경제력을 갖출 수 있었지만 군사력에 대한 통제로 예전의 영광을 찾을 수 없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강한 경제력 아래 강한 군사력이 발전할 수 있지만 예외적인 상황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다. 전쟁의 역사에 대해 알면 알수록 강한 힘만이 자신을 스스로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무기라는 것을 배우게 되는 것 같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