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무제 치세 전반에 걸쳐, 흉노 원정은 지속되었다. 기원전 129년 한나라는 흉노를 파멸시키거나 혹은 복속시키겠다는 대전략을 세운 후, 최초의 대규모 장거리 원정을 시행했다. 전쟁 첫 10년에 걸쳐 한나라는 결정적인 승리를 여러 차례 거두었다. 하지만 흉노와의 전쟁은 끝나지 않는 혈투로 고착화되어 갔다. 기원전 129년에 이뤄진 첫 대규모 원정을 보면, 각기 다른 4개의 기병 부대가 동원되었고, 각 한 개의 기병 군단의 숫자는 10,000명의 정예병이었다. 기원전 119년의 원정을 보면 두 개의 독립적인 기병 부대가 동원되었는데, 각 기병 군단의 숫자는 50,000명 정도였다. 기원전 97년에 이르면, 총 70,000명에 달하는 기병과 140,000명의 보병대가 흉노 원정에 파견되었다. 한나라 군대의 공세는 막강한 기병대의 주도하에 이뤄졌다. 다만 사서에 나온 숫자를 꼭 문자 그대로 신뢰할 필요는 없는데, 한나라의 사관들은 말버릇처럼 기병에 대해 "수만수만" 읊조리기 때문이다.
기원전 119년의 원정에서는 말을 140,000필이나 동원했는데 살아 돌아온 건 고작 30,000필뿐이었다고 하니 원정의 소모가 어마어마했을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이런 대규모 기병 공세는 수양제가 113만명을 동원해 고구려 원정을 하였을 때 중기병만 10만명을 동원했다든가, 원•명교체기인 1372년쯤에 홍무제가 기병 15만명을 삼등분해서 몽골 원정시켰던 때를 제외하면 거의 나오지 않는다. 한나라를 제외하면 고대의 그 어떤 정주 제국도 보병은 몰라도, '10만'에 이르는 '기병'을 지속해서 '장거리' 원정에 투사한 사례는 존재하지 않는다. 로마 제국, 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 제국, 사산조 페르시아 제국, 전성기의 마우리아 제국 어디도, 보병은 몰라도 10만 혹은 그에 육박하는 기병을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에 걸쳐, 그것도 수비가 아니라 '장거리 원정'에 투입한 사실은 없다. 무제 때는 아니고 나중인 한선제 때의 일인데, 흉노가 퇴각하다가 잘못 걸려서 선우의 친족들과 공주까지 포함된 39,000명이 사로잡힌 적이 있다. 이런 물량 공세에 흉노 역시 무작정 도망가는 작전을 맘 놓고 편하게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확실히 무제가 흉노와 치킨게임을 하며 끝내 격퇴하여 밟은 것이 꽤 여파가 길게 갔고, 북방 민족에 대해서 확실한 주도권을 잡긴 했지만, 덕분에 거대해진 제국을 유지하고, 계속되는 전쟁 비용과 토목 공사 비용을 대기 위해 무제는 새로운 농업 생산량 증대 기술을 도입했다. 그는 흉노 원정의 재정을 마련하기 위해 원수 3년(기원전 120년), 제나라 출신의 소금 거물 동곽함양(東郭咸陽), 그리고 남양 출신의 거물 철상인 공근(孔僅)이라는 특출난 재무적 역량을 가진 인재 두 명을 뽑았고, 이 둘을 탁월한 재정 능력을 지닌 낙양의 대상인 가문 출신 인물인 상홍양에게 붙여주었다. 무제는 상홍양을 기용하여 소금과 철을 전매했으며, 물가 조절을 빌미로 균수법(均輸法)과 평준법(平準法)을 실시해 심한 상업 통제로 부유한 상인들의 호주머니를 박박 긁어 많은 원성을 샀다. 상홍양의 정책은 후일 '막대한 국방비 재원 마련을 위해, 비정상적 경제계획과 재정정책, 특별세의 고안과 시장통제계획을 도입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중국학자 창춘수의 비판). 균수는 관청에서 상업 활동을 하는 것이고 평준은 물가를 조절하는 것으로 이 점은 사마천이 엄청나게 까기도 했다. 이 정책은 이렇게 상업의 발전을 억누르는 원인이 되었으나 한편으로는 부유한 상인의 매점매석을 근절해서 물가를 안정시켰으며 국가 재정을 확충하는 데 도움이 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무제 사후, 이 정책의 당위성을 놓고 외조(찬성파)와 내조(반대파)가 사상적, 정치적으로 대립하게 되는데, 당시의 논의를 기록한 책이 바로 그 유명한 "염철론"이다. 외조와 내조의 갈등은 극단으로 치달아 결국 직접적으로 충돌하기에 이른다. 이때 술의 전매 제도는 폐지됐지만, 소금과 철은 무제 시기의 전매제가 그대로 유지되었다. 이 정쟁은 국가 정책의 대립인 동시에 고명대신들의 권력 투쟁의 장이었고, 소제는 내조의 수장인 곽광의 손을 들어주었다. 김일제 사후 내조의 제2인자인 상관걸과 외조의 수장이었던 상홍양 등은 궁지에 몰리게 되었고, 결국 연왕을 옹립하려는 역모를 꾸몄으나 들키고 말았다. 상관걸과 상홍양을 비롯한 일족이 모조리 멸족당했고 균수, 평준을 비롯한 무제 시기의 신 정책들은 곽광의 측근인 두언년에 의해 대부분 폐기되고 만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이런 염철의 국가 개입과 경제 정책의 국가 주도는 이미 제환공 시절 관중이 시행했을 정도로 유서가 깊은 것이었고 후대 중국 왕조, 한국 왕조들도 사용해왔으며 현대 중국에서도 2017년까지도 소금 전매제가 유지되어오다가 시대의 변화로 소금전매가 더 이상 국가재정에 도움이 되지 않는 시기가 되어서야 폐지했다. 결국 근본적인 문제는 한 무제의 지나친 씀씀이와 흉노 원정으로 인한 재정적자 때문이었는데 이런 식으로 낭비를 거듭하다 보니 백성들에게 부담이 엄청나게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30년쯤 뒤 하후승은 그런 피해를 "온 백성이 유랑민이 되고 그 절반은 죽었으며, 풍년이 들어도 기아를 면치 못해 서로 아이를 바꾸어 잡아먹었다"고 묘사했다. 단, 그렇다고 아예 방조한 것은 아니고 무제 자신은 구난 사업에 상당한 심혈을 기울인 편이다. 문제는 구난 사업을 펼쳐도 자신이 백성들에게 끼친 피해가 너무 막대했기에 구난 사업이 아무 소용이 없었고 그저 불만 달래기에 불과한 것이었다는 점.
토목 공사에서 언급되었듯이 곽거병의 흉노 원정은 한 제국의 국가 재정에 기여분은 그냥 병아리 눈곱만큼조차도 없었다. 게다가 머나먼 원정을 성공한 기린아 곽거병의 군대의 공을 치하하는 데 아낌없이 상을 듬뿍듬뿍 내려줬기 때문에 한 제국의 재정 상태는 더욱더 나빠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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